레디 플레이어 원, 보다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봤다. 두 번째 관람이다. 먼저는 아이맥스 3D로 봤고 이번에는 4D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4D 경험이 <드래곤 길들이기2>(2014)였으니 무려 4년 만에 두 번째 4D 극장을 방문한 셈이다. 그 후로, 아니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판타지, SF, 액션 등 4D로 볼 수 있는 쟁쟁한 영화들이 있었지만 한번도 어떤 영화를 꼭 4D로 보고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같은 영화를 2D로 관람했을 때와 비교해 3D 관람이 줬던 영화적 즐거움과 감동(<아바타>와 <그래비티> 등)에 비해 3D와 비교해 4D 관람이 줄 수 있는 그것이 크지 않았다고 생각한 게 가장 큰 이유이다. 상영관과 스크린의 크기가 훨씬 작고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그렇게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4D 극장을 평생 두 번째로, 그것도 이미 한 번 본 영화를 보려 찾은 것이다.
흔히 이 영화를 두고 대중문화에 바치는 헌사, 그리고 지난 수십년 간 대중문화를 향유했던 세대에, 그 시절과 지금을 사는 덕후들에게 바치는 선물이라 표현한다. 대중문화를 향한 스필버그의 사랑, 그것이 가지는 힘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이 흘러 넘쳐 전달되는 감동은 울림이 상당하다. 그러나 내게는 좀 다른 의미로도 선물 같은 영화다.
포스터부터 근사한 것이 마음을 흔든다.
내 중고등학생 시절, 심지어 대학 시절 초반까지 가장 많이 읽었던 소설의 장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 답은 '가상현실 게임 판타지'일 것이다. 사실 어디가서 자랑처럼 늘어놓기에는 멋쩍은 일종의 guilty pleasure지만. 고백하자면 못해도 서른 작품(대부분 판타지 소설이란 단권이 아니기 때문에 권수로 치자면 200권을 훌쩍 넘지 않을까) 이상의 소설을 읽었던 것 같다.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달빛 조각사> 등의 유명한 작품들은 물론 만화방, 책방에 가면 버젓이 책장 한 칸을 차지하던 가상현실 테마의 소설을 퀄리티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읽었으니. 유독 거기에 꽂혔던 이유를 하나만 꼽을 순 없을 것 같다. 현실 적응이 더뎠던 내 도피처이자 언젠가 실현 가능할 것만 같은, 아니 '실현이 거의 확실한 판타지'라는 사실이 주된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건담도 좋고 샤이닝도 좋다. 킹콩도 좋고 오락실 게임도 다 나도 향유했던 문화다. 그러나.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 가상현실 게임 덕후의 꿈을 현존 최고의 기술력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충족시켜주고자 발벗고 나선 감격스러운 작품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그 안에 담긴 무수한 대중문화 레퍼런스에 젖어들기도 전에, 주인공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가 자신의 아지트에서 헤드 기어 장치를 착용하고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 영화가 몹시 신선하고 새롭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익히 보아온 영웅 서사의 문법이며 스티븐 스필버그와 디즈니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의 주제와 메시지. 게다가 그동안 질리도록 본 가상현실 게임 소설들과 이야기 구조도 거의 흡사하다. 아니, 원작이 '가상현실 게임 소설'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우선 가상현실 게임의 실현은 꼭 엄청난 천재 한 명의 혁혁한 공로로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평범하다 못해 궁핍한 삶을 사는 주인공이 가상현실 게임에서 (대개 끈기, 성실함,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특별해지고 조력자들과 함께 (대기업, 국가 기관 등의 거대 세력이 단골로 등장하는) 악당의 마수에서 소중한 것과 게임 속 세상은 물론 현실의 세계를 지킨다.
가상현실 세상 '오아시스'를 만든 천재 덕후 제임스 할리데이.
웨이드와 그의 친구들. 스필버그답게 인종 안배까지 골고루 한 팀원들. (사진엔 흑인 친구 한 명이 빠져있다)
영화의 악당으로 등장하는 대기업 I.O.I. 우연의 일치치고는 놀라운 작명 센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스필버그라서, 할리우드라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을 거의 만족시켜준 결과물이 나온 게 아닐까. 드문 일이다. 한 세계 혹은 세계관을 구현했다는 사실만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은. 그게 바로 덕후의 마음일까. 제법 오래 잊고 있던 내 어린 날의 로망이자 판타지가 영화를 통해서나마 구현된 것을 보고 있자니 어서 빨리 내가 직접 그 주인공이 되보고 싶은 낯뜨거운 욕심에 몸이 달아 두 번째 관람인 것이 무색할만큼 순식간에 영화의 끝을 다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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