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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day/폰일기

오역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라는 물음에

너굴아앙 2018. 5. 17. 21:15

늘 그러듯 들불처럼 타오르다 어느새 다시 관심에서 멀어진 듯한 뉴스에 대한 뒷북. 영화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의 번역을 둘러싼 논란이 상당했다. 주로 문학작품, 뉴스 기사나 칼럼, 심지어 FTA까지 다양한 방면의 오역 논란이 늘 있었지만 요즘의 오역 논란 트렌드는 영화 자막이 주도하는 것 같다. 그만큼 우리나라 대중문화에서 영화가 차지하는 영향이 막대하니까. 하물며 MCU 10년의 집대성이라는 영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영화 자막에 대한 관심과 경계심(?)도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게 쉽게 짐작 간다. 아니다 다를까, 수준 높은 한국의 영화 관객들, 그 중에서도 가장 덕력 높고 자부심 강하며 영어도 잘 하는 마블 팬들은 이 영화의 자막에 분노했다.

의사가 잘못을 저지르면 의사의 의견이 궁금해지기 마련이고 성직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해당 종교를 믿는 사람의 의견이 궁금해지기 마련. 오역 논란이 있을 때면, 그것도 이렇게 큰 이슈가 될 때면 직업 번역가라 소개하며 여전히 겸연쩍어 하는 나 같은 사람도 으레 좋은 먹잇감이 된다.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은 반쯤은 호기심, 반쯤은 날 난처하게 만들 생각으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그러니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ice-breaking 거리로 제격이라 생각하며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면 나는 사람에 따라 적당히 장단을 맞추며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을 하면서도 알게모르게 편을 들게 되고 옹호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며 나름의 중립을 지키려 의식적으로 애쓰곤 했다. 지금 당장 떠올려보자면 본격적으로 번역을 업으로 삼은 후 내가 질문을 받을 정도로 큰 이슈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번역 논란과 이번 마블 영화 논란 정도였던 것 같다. 물론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이를테면 '번역론 논쟁'에 가까웠고 후자는 엄연한 '오역 논란'이니. 전자의 경우 누군가 묻는다면 전문가인냥 열심을 다해 대답할 수 있으나 후자는 마치 공범인냥 나도 모르게 변명을 하게 된다. 내 스스로도 영화 번역의 세계에 대한 오래된 반감과 불신이 있음에도.


하지만 내 반감과 불신은 어떤 한 개인 번역가를 향한 것이 아니다. 명백한 오역을 그것도 상습적으로 저지른 번역가의 잘못은 엄연하지만 청와대가 나서서 그 한 사람을 영화판에서 제명하고 다시는 발 못 붙이게 할 수도 없고 그게 해답이 아니라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익숙하고도 지겨운 논쟁이다. 잘못한 개인에 대한 책임 추궁과 처벌이 중요하냐, 아니면 시스템과 구조의 개선이 중요하냐. 국가적 비극이 일어날 때 그랬고 사기업의 횡포가 드러날 때 그랬고 소위 엘리트 혹은 사회 지도층의 일탈이 폭로될 때도 그랬다. 둘 다 중요하며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거야 어느 누가 모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인 처벌과 시스템 개선 중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한다면 나는 후자라 생각한다. 

생각해본다. 우리는 얼마나 '잘' 분노하는지. '잘' 한다는 건 '너무 쉽게' (그리고 때론 과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옳게, 훌륭하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분노 덕에 분명 발전도 있었고 변화도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에 대한 분노는 오래 못 가기 마련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게 직접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힌 게 아닌 이상에야 그토록 오래 적개심을 품는 건 정신적 에너지 소모 차원에서 몹시 비효율적인 일이니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걸 한국인의 냄비 근성이라 욕할 일도 아니며 대중이 우매하다 혀를 찰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언론이 있고 정치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때때로 이런 식의 말에 회색분자 또는 이상주의자라며 핀잔이 돌아오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다시 <어벤져스> 영화 오역 논란으로 돌아오자면, 나는 그 번역가를 욕하는 무수한 댓글들과 자극적인 기사들이 부당하다 말할 수 없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시장을 자랑하는 한국 영화업계의 놀랄만큼 조악한 시스템과 구조 속에서 그런 오역이 충분히 생길 수 있다고 머리로 이해는 할 수 있을지언정 너그러히 눈감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을 그 지나친 비난과 지나친 분노가 가슴 아프고 걱정스럽다. 직접 관련된 건 아니지만 번역이라는 큰 집단으로 볼 때 같은 곳에 속한 사람이라 더 그렇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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